2008년 12월 22일 월요일

너의 취향을 존중할테니, 나의 취향도 좀 존중해주련?

제목을 보고 설렌 마음을 감추지 못하시는 다섯개의 덕을 갖춘 군자(五悳君子)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번에 이야기하고자 하는 건 다름아닌 종교에 대한 문제다. 그것도 기독교라는 민감하시고도 나름 현대화된 종교말이다.

일단 취향이라는 것은 요즘 나같은 덕을 갖췄던 자들에게는 상당히 미묘한 느낌을 주는 단어임이 분명하다. 최근들어 디시인사이드라는 곳의 일본-애니메이션 갤러리에서도 이걸 두고 싸우는 군자들이 등장했다는데...

기독교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취향은 내가 알기로 66권의 책을 한권으로 묶은(?) 성스러운 경을 숭배하고 거기에 나온 말들을 진실로 여기며, 또 하느님의 아들로 알려진 예수님의 형상을 새겨서 벽에 매달거나 그를 처형할 때 썼던 십자가를 성물로 여기는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런 경건한 분들의 취향을 싫어하는 들이 있어, 이 사람들은 정말 몸서리처지게 기독교를 비판한다.(거기에는 나라는 이상한 녀석도 포함된다.) 과거의 예를 들고 이집트 신화를 예로 들고, 시작해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무지막지하게 남의 취향을 까부수고 막 침을 뱉는 것이다.

나는 본디 그들의 취향에 대해서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물론 과거에 킹 제임스판인지 뭔지하는 이상한 오판때문에 세계의 종말이 곧 닥칠 것이라고 믿거나, 우리가 사는 이 모든 것이 신의 뜻에 달렸다고 하는 조금 이상한 소리들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지만 그들의 취향이니 만큼 나는 그들의 그 특이한 발상들과 개념들을 존중하고 있었다.

그래, 이 사람들 조금 이상하지만 이렇게 철썩같이 믿고 따르는데, 내가 어찌 같은 사람으로서 이들을 함부로 욕할 것인가. 사람과 사람이라면 취향이면 존중해줘야지!

라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앞서 이야기했듯, 이제는 이들의 취향을 정말 싫어한다. 심지어 평소 즐겨하던 게임에 등장하는 캐릭터가 '당신은... 신을 믿으시나요?'라는 대사를 내뱉자 노트북 자판을 내리칠 뻔하기도 했다.

그들은 나를 왜 이렇게 만들었는가? 간단하다. 내가 그들의 취향을 존중하지만, 그들은 나의 취향을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다.(항가) 대체 내가 어째서 진리탐구를 하는 큰 학문씩이나 가르치는 곳에 와서 그렇게 많은 시간을 기독교에 대한 역사와 목사아저씨들의 야릇한 설교를 들어야만 하는 것일까? 내가 그들을 존중한다는 것을 설마 자기들이랑 같은 생각을 하는 것으로 받아들인 것일까? 그래서 동성애니 또 하여튼 그 어떤 표현의 자유도 그들의 눈에 안맞으면 무조건 있는 것 모두 욕하고 불지르고 스프레이로 난도질을 해야한다는 것인가?

물론 그들이 믿고 따른 것에 선교를 하라던지, 억지로 믿게하라는 어투의 말이 있다지만 그들은 어째서 가장 민주적이고 인간에 다가섰던 예수님의 말을 하나도 따르지 않는 것일까? 예수님은 성서에 따르면 로마 제사장들의 취향을 받아들이고, 전 인류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기까지 했는데 말이다!

이 글을 읽고 속이 뒤틀려서 신의 저주를 받으라고 하신다던지 하여튼 마구 욕하실 분들이 보이거나, 또는 개종을 권유하는 분들이 있으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를 이렇게 만들었던 것은 처음부터 기독교를 미워했던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당신들의 취향을 존중함에 불구하고 당신들은 나의 취향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당신들의 틀에 나를 때려박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다시한번 당신들의 취향을 되살려 한마디 해주겠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 이 꼬맹이 인간들아 'ㅅ'

생계형 범죄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생계형 범죄자라니 ㅠㅠ

생계형 범죄

이것도 떡밥이랄까... 여튼 나같은 찌질찌질한 떡붕어가 물기 좋아하는 그런 떡밥인데 겨울이라 그런지 물기에는 너무 딱딱하게 굳었지만

어찌 되었든 간에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 적어보려고 한다. 일단 우리는 생각하는 붕어이니만큼, 정의를 내려봐야 한다. 생계형이라는 건 무슨 말인가? 일단 생계라는 것은 사전에 이렇게 되어있다.

살림을 살아나갈 방도, 또는 현재 살림을 살아가고 있는 형편.

그렇다면 생계형은 어떤 것인가? 形이라 하면 형상이라는 뜻을 담은 것인데 한자를 잘 모르는 붕어인 이상 이렇게 해석해보고자 한다.

살림을 살아나가는 형상, 또는 현재 살림을 살아가고 있는 모양새

음... 너무 멍청해뵈나? 하여튼 간단하게 붙여넣으면 이런 뜻인데 생계형 범죄라고 하는 것은 뭔 소리인고? 그러니까 얼핏 보아서는 살림을 살아나가는 형상을 유지하기 위해 범죄를 저지를 것일런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네!!! 제기랄!

내가 해석한 것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생계형 범죄에 대한 이 정부나으리들의 태도다. 최근들어(대한민국 기준, 이미 과거)  생계형 범죄에 대한 처벌 완화를 추진한다는 이 정부.

좀 미심쩍은 언론이라고 생각하지만, 서울신문은 이 조치에 대한 세부사항을 다음과 같이 전달해주었다.
검찰은 내년 1월부터 6개월 동안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는 통상 벌금액의 3분의1 수준으로 낮춰 구형하기로 했다. 또 의료급여 대상자,차상위계층,장애인,본인 외 가족을 부양할 사람이 없는 사람 등은 납부 가능성 등을 고려해 필요하면 벌금 구형을 2분의1 또는 3분의1 수준으로 깎아주고 재범 가능성이 없고 사안이 경미하다면 기소유예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검찰은 음주운전을 제외한 경미한 도로교통법위반이나 식품위생법위반 등에 이를 적용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그리고 내가 몰랐던 사실도 덧붙여 주었다.
검찰은 외환위기가 있었던 1998년에도 비슷한 관용 조치를 취한 바 있다.

10년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진실로 잃어버린 10년이었다는 사실을 매번 느낀다.) 그러니까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라던지 해서 불쌍한 분들은 범죄에 대한 처벌을 낮춰주겠다고 한 것인데... 좀 웃기지 않는가?

아는 사람들이야 다 아는 사실이지만, 이번 이명박 정부는 그 수장인 이명박씨 자체부터가 좀 미심쩍은 인물이다. 항간에서는 전과 14범인지 하는 사람이라고들 하는데 이런 소문이 도는 대통령께서 친히 생계를 위해 마지못해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을 봐주겠다고 한 것이다.

말이 복잡해지고 있어 정리해본다. 기초생활보장 수급 대상자에 대한 이른 바 생계형 범죄는 감형해주는데, 이걸 추진하는 정부는 꽤나 잘못을 저지른 이명박이라는 사람이 대통령이십니다. 이런 조치가 1998년에도 있었다지만, 범죄를 저지른 분인지라, 자신처럼 살기위한 하나의 방도로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에게 동질감을 느낀 것인지, 범죄를 해도 괜찮습니다라고 해주는 것일까?

1998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은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차라리 기초생활보장비를 받는 사람들에게 돈을 더주고 말지(붕어의 생각이니 비판을 해주시면 감사하겠다) 범죄를 저질러도 괜찮아요라는 식의 일시적 법 완화는 무엇인가?

하기야 배고파서 시장을 돌며 돈을 훔친 불쌍한 젊은이는 잡아다가 교도소에 넣어버리고, 생계와 교육을 위해서 이리저리 분주하게 자신의 집터를 옮기시고 또 하여튼 오매불망 사업계획을 세우신 분은 털끝도 건들이는 이 나라의 태도를 돌이켜 생각해보면 은근하게 범죄를 부추기는 잃어버린 10년 전의 정책을 다시금 일으키시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대한민국은 우리를 이렇게 가르쳤다.

나는 문자로써, 그리고 다른 이들의 글자로써 그를 만났다. 그는 고등학생이었는데 불행하게도 담배를 즐기는 습관이 있었고 그래서 자주 학교에서 적발되었다고 한다.

어느 날, 그는 담배를 피우던 것이 3번째로 걸렸고 그리하여 그의 부모에게는 자식을 자퇴시키거나 전학시키하는 말을, 그의 선생이, 그의 학교가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를 분명 차가운 LCD 스크린 위에서 글자로써 또 한겨레라는 신문이 적어놓은 기사로 보았지만 나는

그 고등학생을 너무나 잘 아는 것 같았다.

내가 고1이라는 나이에, 나의 담임선생(이 선생님은 내가 기억하기에 흡연을 하진 않았다. 그래서 당당했는지도 모르겠다.)은 학생지도부 소속이였고 어느날 내가 보는 앞에서 담배를 피우던 다른 '학생'을 적발하여 담배를 빼앗고 있는 힘을 다해 얼굴에 손바닥을 연타했다.

그래

나는 지금까지 살아왔던 21살 인생동안 무엇을 보았는지 알것 같았는데 금연건물이라고 쓰여진 교내의 은밀한 남자만을 위한 좁은 방에서 담배를 미친듯이 피워가며 우리의 수업을 방해했던 그 선생들이 뭘하고 살았나 했더니

지금보니 담배를 피우던 학생들을 담배필터에 거르듯 거르고 또 걸러서 이제는 배우지도 못하게 하는구나. 그게 학교였고 또 하늘같은 스승님의 은혜였구나! 담배피우는 선생이 담배피우는 제자를 때리고, 패고 퇴학시키고 교육자라는 이름으로 가르침을 못받게 하니 이게 대한민국이 우리에게 해왔던 짓

이라는 것을 이제야 나는 알았다.


2008년 12월 10일 수요일

죽음, 첫번째 이야기; 종다리



떨어지는 소리였는지,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였는지
종다리의 꿈을 깨고 말았다.

며칠 전에 보았던 갈색, 회색 수놓은 종다리가
보도블록 옆, 작은 화단에 누워있었다

머리가 달아나서는 몸통만 남은 갈색 종다리가
그렇게 온 몸을 오므리고 길게 누웠다

머리에 다리가 달려 어디로 달아났던지, 다리없는 몸통
가슴의 털만 잔특 뽑혔다

끔찍하다. 누군가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 머리, 다리가 미친 듯이 도도도도도도
주황색의 가로등이 가득 비추고 있는
한 겨울밤의 도로를 질주하는 모습을 보지 못해서.


그렇지만, 그 남은 몸통에는 삶의 흔적이 없었다
날개-몸-끝. 나는 기계였던것

하늘을 살기위해 날아야했던 종다리는
그래서 그렇게 기계를 벗어던지고서는

머리에 다리를 떼어붙이고, 안녕 나는 지상을 달리고 또 달리고
또 달려서 저기 지하로 내려갈거야 하고

아직 봄이 체 오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틀을 벗어던지고서
달려보지 못했던 한 밤의 꿈을 달렸던 것이다.

잠, 죽음, 그리고...

내가 원하는 건 잠드는 것

잠드는 것 만큼 편한 것도 없으니까

 

하지만 제일 편안한 것은

죽음. 쉼도 없이 영원의 강

그 상류로 조용히 흘러가는 것


그렇지만

내가 제일 바랬던 것은

이 세상에

이 거대한 흐름에

발 조차도 담그지 않은,

차라리

이 곳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했던 것

오늘은.....

생각할 것도 없이...

 

그런 날은 너무 슬픈 날임이 분명합니다. 이제는 아무도 장문(長文)을 읽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경악을 했지만 이젠 저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는 입을 딱 다물어버리는게 종착역입니다.

 

-단문의 왈츠-

 

저는 이 시대를 이런 말로서 정의하고자 합니다. 이제는 장문의 노랫소리는 저어 멀리 노을보다도 애처로운 모습이 되었고 또 단문들은 그 노래들의 한 음조차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단문들이 날뛰는 동안, 우리는 또 이제 장문은 없구나 하지는 못하고 그게 또 장문으로서의 자리에 등극을 시키고는 이거도 너무 길다고 생각해서 다시 장문의 장에서 단문들을 끄집어내어서는 처참하게 팔과 다리를 잘라내어서 몸뚱아리와 머리만을 장에 모시고는 다시 잊기 십상입니다.

 

 

그러면 또 다른 단문의 헐떡이는 왈츠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죽음의 왈츠. 단문으로서의 수명이 다되기 전까지 이미 장문이 되어버릴 그 단문들은 처절한 몸놀림으로 이곳 저곳을 들러서는 있는 힘껏 자신을 뽐내면서 길게길게 늘어져버리고는 또다시 뭉텅뭉텅 몸이 잘리여 괴롭게 몸을 떨다가 이제 그만 모든 열기조차 사그라들어서 자신조차도 기억을 못하게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누군가 말할 수 있겠지만... 아, 영원히 빛나는 저 장문들을 보아라. 단문들이 날뛰어도 유구할 저 장문을 보아라 하고.

 

하지만 이런 것조차도 이젠 낭설입니다. 고대의 장문은 보존되어도 이미 사람들의 가슴 속을 세차게 파고 들던 이전의 모습은 초상화마냥 슬픈 눈빛속에서 영원히 추앙의 꿈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되어버렸기 때문에.... 이젠 쓸모가 없어진 것임은 분명합니다.

 

이제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요. 결탁할 자리도. 이젠 없는 것임이 분명한 걸까요? 이젠 무엇을 해야 할지 조차도 잊은 듯 합니다. 그냥 이 길쭉한 단문의 소용돌이 속에서 마냥마냥 잠드는 것 밖에는, 더이상 할 일도 없을 것이기 때문에....

 


2008년 12월 1일 월요일

종교, 그 전승의 길

종교. 종교라는 것은 역사적 요소를 가장 많이 포함하고 있으면서도 가장 증명이 안된 부분이 많은 요소를 동시에 가진 모순적인 존재다. 그도 그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종교의 대부분들은 지금까지 인간의 머리와 손으로서 전해온 경들을 통해 알려져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료의 가장 핵심인 진실성에 관한 논의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교의 가장 큰 특성을 알고 있다. 바로 전승되어 왔다는 것이며, 인간이 썼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대의 신앙과 기독교의 믿음의 원류는 과연 어디서부터 전승된 것일까?

 

일단 문명의 발상지인 나일 강변에서 태어난 이집트의 '태양신'을 보자

 

호루스, 이집트의 태양신. 빛의 아들이며 세트라는 밤의 신의 그의 적이다. 선과 악, 또 빛과 어둠이라는 흔한 대결구도에 서있는 신이다. 이집트인들의 기록에 따르면 호루스 신은 기원전 3천년 전, 12월 25일에 태어났으며 Isis-Meri가 처녀수태했다. 또한 동방의 별(Star in the East)가 그의 출생을 지켜보았으며 3명의 왕이 그의 탄생후 그를 따랐다. 12살에 신성한 지도자가 되었고, 30세에 아누프(Anup)에게 세례를 받고 종교생활을 시작했고 12명의 제자와 함께 방랑하며 병자를 치료하고 물 위를 걷는 등의 기적을 행했다. 그는 진리, 빛, 목자, 신의 양, 주의 아들 등으로 알려졌다. 타이폰의 배신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뒤 3일 만에 부활했다.

 

이런 호루스의 특징들이 원조(original)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일반적인 종교의 구조를 가지는 신화들 속의 다른 신들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아티스(ATTIS) - 그리스의 신, Nana가 처녀수태, 기원전 1200년경 12월 25일 출생,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 3일 뒤 부활

 

디오니소스(DYNISUS) - 그리스의 신, 기원전 500년 경 처녀수태로 12월 25일 출생하고 가르침을 행하며 방랑했으며,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기적을 행했다. 왕들의 왕(King of kings), 신의 독생자, 알파와 오메가로 불리었고, 죽음과 부활을 계속 반복한다.

 

미트라(MITHRA) - 페르시아, 기원전 1200년 경 12월 25일에 출생, 12제자와 기적을 행하고 죽은 지 3일만에 부활했으며 빛, 진리 등으로 불린다. 흥미롭게도 미트라의 숭배일은 'SUN'DAY이다.

 

중요한 점은 각기 다른시대의, 수많은 세계의 구세주들이 거의 비슷한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것일까? 왜 처녀수태이고 12월 25일에 태어났으며 죽은 지 3일만에 부활하고 제자는 12명이었을까?

 

이번에는 우리가 아는 가장 최근의 구세주에 대해서 알아보자.

 

이사람은 베들레헴에서 Mary(마리아)의 처녀수태로 태어났다. 도한 동방의 별이라고 불리는 동방의 세 현자 혹은 세 왕에게 태어난 직후 숭배되었다. 12세에 가르침을 시작, 30세에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성직을 시작하고, 병을 고치고 물위를 걷고 죽은 자를 살렸고, 왕들의 왕, 신의 아들, 세상의 빛, 알파와 오메가, 신의 양 등으로 불렸다

 

제자 유다에게 은 30개에 팔려 배신을 당해 십자가에 못박혀 처형당하고 3일 후에 부활, 그리고 승천했다.

 

그의 이름은 예수이다.

 

일단 그의 출생은 순전히 천문학적이다. 시리우스라는 별은 동쪽에서 가장 밝은 별이고, 12월 24일 오리온자리의 3개와 일직선을 이룬다. 이 오리온 자리의 세 별, 즉 오리온의 허리띠인 이 별들은 지금도 세 명의 왕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12월 25일이 되는 순간 이 세명의 왕과 가장 밝은 시리우스는 태양이 뜨는 동쪽을 향하게 된다.그러니까 즉, 세 명의 왕들은 태양이 탄생하는 일출의 시작을 가르키는 시리우스의 뒤를 따르게 되는 것이다.

 

처녀자리, VIRGO. 처녀를 뜻하기도 하는 단어이며 이는 House of Bread와 밀을 상징하며 이는 즉 추수의 계절인 8월과 9월을 뜻한다. 그런데 베들레헴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바로 House of Bread 이다. 그러니까, 베들레헴은 지구상의 한 장소가 아니라 하늘의 별자리인 VIRGO, 처녀자리를 뜻하는 것이다.

 

또한 12월 25일, 혹은 동지라고 부르는 이 날의 현상에 대한 것은 어떨까? 북반구에서 관찰하면 하지에서 동지로 가까워 질수록 태양이 떠 있는 시간은 자꾸만 감소하며 지구상의 생물들은 시들고 죽어가게된다. 즉, 태양의 죽음이자 인류에게는 고난의 시대가 오는 것이다. 태양은 6달 내내 계속 남쪽으로 이동하다가 12월 22일이 되면 가장 낮은 지점에 위치하게 되며 이날은 태양이 가장 작아져 보인다. 재미있는 것은 이 다음부터이다. 이때부터 사흘동안(22, 23, 24일) 태양은 남쪽으로의 이동을 완전히 멈춘 것처럼 보인다. 같은 시간에 보면 항상 정확한 위치에 3일동안 떠있는 것이다. 이후 25일이 되는 순간부터 낮이 길어지고, 기온이 올라가는 봄이 온다는 것을 알리는 듯 태양은 북쪽으로 1도 이동한다.

 

즉, 우리의 태양은 십자가에서 사흘동안 죽었다가 부활하는 것이며 예수와 다른 태양신이 공유하는 동일한 점이다. 즉,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3일 후에 부활하는 공통적인 컨셉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구원을 왜 기독교에서는 부활절, 즉 춘분 날에 기념하는 것일까? 왜냐하면 춘분이 지나야만 봄이 오고 진정한 '구원'의 시대가 오는 것이다.

 

한편 12제자의 그것또한 가장 천문학적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다. 일단 진실이라고 생각되는 견해를 먼저 밝히면, 그들은 천궁도 상의 12개 별자리이다. 즉, 태양과 그를 따르는 12개의 별자리이다.(또한 이 12라는 숫자는 성경 속에서 계속해 반복된다.) 한편, 십자 천궁도는 이러한 천궁도 중 가운데의 태양을 가장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즉, 태양의 가장 가운데에는 십자가가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십자천궁도는 이교도의 표식이기도 하다. 이것은 이교도들의 변형된 십자가였을 것이다. 즉, 기독교의 상징은 원래 우리가 이교도라고 부르는 것들에서 나온것이다.

 

한편 이러한 천문학적 요소들은 성경에서도 계속나타는데, 바로 '시대(AGES)'에 관한 것이다. 왜 하필이면 이 표현을 그토록 많이 쓴 것일까? 우리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춘분점 세차라는 자연현상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오랜 기간의 관측을 통해, 약 2150년 주기로 천궁도 상에서 일어나는 위치가 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는 지구가 자전할 때, 지구가 가지는 자전시의 각도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이떄 별자리는 정상적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뒤로 이동하게 된다. 우리는 바로 이것을 세차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세차가 천궁도의 12 별자리를 모두 통과하는데에는 대략 25765년이 걸리며 이것을 바로 Great Year(위대한 해)라고 부른다. 고대인들은 이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25765년을 12로 나누면 2150년인데, 바로 이 기간을 고대인들은 'AGE'라고 불렀던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내용은 바로 3개의 '시대'를 우화적으로 기록하고 향후 4번째의 시대가 올것임을 알리는 암시의 기록인 것이다. 구약에 따르면 모세가 십계명과 함께 시내 산으로 내려왔을때, 타락한 유대인들이 황금송아지(Golden bull calf)를 만들어놓은 것을 보고 분노하여 돌판을 부수고 서로 죽여 죄를 사하게 했다고 한다. 아마도 단순하게보면 모세가 이교도적 행동을 하고있는 유대인들은 보고 분노해서 그런것 같지만, 실질적으로는 그 당시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시대인 황소자리의 시대를 자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모세가 그 순간에 나타나서 황금송아지에 대해 화를 낸것일까? 모세는 바로 에리스 시대(Aries AGE), 즉 양(lamp)의 시대인 기원전 2150년이 온 것을 알리는 존재로서 등장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떄문에 아직도 유대인들은 양의 뿔로 된 나팔을 분다.) 즉, 구 시대의 것을 버리고 새로운 시대가 왔다는 것을 알리는 존재가 바로 모세인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것인지, 미트라를 비롯한 다른 몇몇 신들도 비슷한 신화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의 신 미트라도 같은 상징으로서 황소를 죽였다.

 

그리고 예수는 바로 서기 1년부터 2150의 시대를 알리는 존재로서, 바로 물고기자리(Pisce, 파이시스)를 뜻한다. 그래서 그런지, 신약에는 중요한 거점에서 물고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가 빵과 '두 마리의 물고기'로 5천의 백성을 먹이니 - 마태복음 14:17. 예수는 갈릴리와 함께 도보 성직을 시작할 때 만난 사람도 바로 두명의 어부(fisher)가 친구로서 그를 따르게 된다. 즉, 예수는 바로 이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자로서 12월 25일에 태어난 것으로 설정되었던 것이다.

 

누가복음(LUKE) 22:10 - 예수의 제자들이 마지막 유월절 잔치는 어디서 열립니까? 라고 묻기를, 보라, 너희가 저 도시에 들어가면 물병을 든 한 남자를 만나게 될 것이니 그를 따라 그가 들어가는 집으로 들어가거라'라고 예수께서 답하시다.

 

이 문장은 성경의 천문학적 비유 중 가장 확연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바로 물병자리. 아쿠아리스(Aquaris)를 뜻하는 것이다. 이 별자리는 항상 물병의 물을 쏟는 모습을 하고 있다. 우리의 시대인 물고기 자리의 시대(AGE of Pisce)의 다음 시대인 물병자리의 시대를 뜻하는 것이다.(AGE of Aquaris) 예수는 파이시스 다음에 아쿠아리스가 온다는 것을 알린 것이다.

 

마태복은 28:20에 나오는 '나는 세계의 끝까지 너희들과 함께할 것이다'라고 적혀있는데, 이는 킹 제임스판 성경의 오류이다. 실제로 쓰인단어는 세계가 아닌 AEON,(영겁, 무궁한 시간) 즉 AGE이다. 예수는 우리들에게 나는 시대의 긑까지 너희와 함께 하겠다고 말한 것이었다. 즉, 아쿠아리스의 시대가 오고 예수의 시대가 끝난다는 것인데, 성경에서 말하는 종말, 시간의 끝이라는 발상은 바로 천문학에 관련된 우화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서 나타난 것이다.

 

문학과 천문학의 혼성물인 예수. 그는 명백한 태양신, 호루스의 표절물이다.

 

대홍수의 개념은 고대시대에서는 일반적인 것이었다. 다른 시대, 시기에도 그런 식으로 인용된 대홍수의 개념이 약 200개 정도가 있었다고 한다. 기독교 이전인 기원전 2600년에 쓰여진 길가메시 서사시는 신의 대홍수와 방주로 피한 동물과 물이 빠지는 것을 알리는 비둘기의 이야기가 성경과 똑같이 기록되어있다.


모세도 표절된 것으로 보인다. 모세는 출생시 죽임(Infanticide, 영아살해)을 피해 바구니에 담겨 강으로 흘려보내지고 왕족의 딸에게 구출되어 왕자로 자란다. 이 서사는 사실 기원 전 2250년경 아카드의 사르돈 신화를 그대로 가져다가 쓴 것이다. 사르곤은 살해를 피해 강으로 흘려보내지는데, 나중에 아키라는 왕의 처에 의해 구출되어 양육된다. 또한 모세가 산에서 십계명, 즉 법전을 만들어와서 내려오는 것도 고대의 신화에서는 흔한 것으로, 모세는 단순한 신화 속 역사의 수많은 법제자 중 하나였던 것이다. 인도의 위대한 법 제정가인 Manou가, 크레타에서는 Minos가 딕타산에서 내려와서 제우스로부터 신성한 법을 전승받았다고 하는 설화가 있고, 이집트에는 Mises가 신의 법전이 새겨진 석판(stone tablet)을 지녔다는 전설이 있다.


자세히 보면 이름조차도 비슷하다. 마누, 미노, 미시, 모세. 또한 십계명은 사자의 서(Book of the Dead)의 125번 주문(Spell 125)를 그대로 베꼈다. 나는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 -> 너희는 도둑질을 하지 말지어다. 나는 살인... 등등 변형하여 인용되는데, 사실 생각해보면 유대의 종교와 기독교는 이집트와 상당히 연관이 깊다. Batism; 세례, Afterlife; 사후세계, Judgement; 심판, Virgin Birth; 처녀수태, Resurrection; 죽음과 부활, Crucifixion; 십자가형, Ark of Covenant; 방주, Circumcision; 할례, Saviors, 부활절, 유대절, 크리스마스....


결국 이런 '사실'들을 놓고 볼때 종교라는 것은 절대로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른다. 사실 그 종교가 가진 가상의 위엄이라는 것을 배제해놓고 냉철하게 생각해보자.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또 하늘의 보이지 않는 그분이 실시간 CCTV처럼 우리를 감시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하지만 왜 이런 말도 안되는 것이 계속 이어져왔는 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필요하다. 왜? 사람들은 그들의 지식을 이런 절대자적 존재로서만 나타내야 했을까? 우리가 풀어야할 그 '전승'의 의미를 생각해보자.


일단 이집트의 파라오는 신의 아들로서, 또 태양의 아들로 숭배되어왔는데 그도 그럴 것이 파라오는 나일강의 범람을 '예언'하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일을 예측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바로 신 자신만이 그 일을 아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사실 그 예언은 순전히 과학적인 천문연구를 통해 얻은 지식인데, 이집트의 지배자들과 파라오들은 그 지식을 독점하여 그걸 마치 기적처럼 보이게 만들고 이로서 자신들을 신의 자손이라고 표현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집트를 탈출했던 먼 과거의 유대종족들을 이끈 지도자들도 자신들을 이런 방식을 통해 신의 예언자로서 표현해야만 했다. 그래야 자신들이 지배자로서 군림할 것이 아닌가? 이는 비단 기독교나 유대교뿐만 아니라 이슬람, 불교, 힌두교도같은 주류종교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는 것이다. 바로 독점적인 지식을 신격화하여 그 사회를 통제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 작용하는 게 종교였다.


종교, 그 전승의 길은 신의 의지나 운명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지배를 지속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고 또 앞으로도 그런 수단으로 쓰일 것이다. 현대에는 그나마 다행으로 인간의 지성으로 밝혀진 여러 사실들과 이론들이 불행하게 지배자의 수단으로 쓰인 경우가 있었지만, 종교는 가장 오래된 지배수단으로 지금까지 그 지위를 잃지않고 있다. 아마 앞으로도 수많은 종교가 나타나고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전승은 절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항왜와 이이제이

항왜란, 다시말해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서 조선군으로 투항하거나 귀화한 세력들을 가르켜 말하는 단어다. 아마도 이이제이라는 전략을 계속 사용해온 한반도의 문화때문인지, 꽤나 많은 왜군들이 당시 조선의 정책으로써 귀화했을 것이다.

 

일단 당시 왜군들은 무의미한 정벌에 대해 불만이 꽤 있었던 것으로 보였으며, 이 때문인지 우리가 흔히 사야가, 즉 김충선으로 알고 있는 사람의 경우 조선에 상륙하자마자 '무의미한 정벌'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평소 동경한 조선에 오고자 참전했다고 하며 항복의사를 밝힌다.

 

이런 것을 볼때, 당시 왜의 세력들은 조선에 대해 상당한 동경심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왜군들이 전쟁초기부터 사야가처럼 극단적인 투항을 하진 않았다. 당연한 것이지만, 자신의 군주를 그토록 쉽게 버리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인 것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기 떄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 1년 뒤에 상당히 많은 왜군들이 투항을 해왔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조선의 제절적 특징때문이었을 것이다. 남쪽 지방에 살던 왜인들이 조선인들도 견디기 힘든 무자비한 겨울의 추위를 견뎌야했으니, 정말 큰 고역이 분명했을 것이다.

 

하여튼 이런 연유로 인해 꽤 많은 왜군들이 투항했고 이들은 조선군으로 재편성되어 전투에 참전하였고, 아까 말했던 김충선의 경우에는 아예 조총에 대한 모든 것을 조선에 넘기는 역할까지 하였다.

 

이런 것이 현대의 우리눈에는 상당히 특이해 보이겠지만 사실 당시 조선에서는 이런 것이 일상적인 일종의 전략이었다. 예전에 벨테브레나 하멜일행 등이 일본에 가던 중 표류해 조선에 도착했을 때, 조선이 취한 태도는 그들 전부를 훈련도감에 보내서 군사로 편성하는 것이었다. 하멜의 경우 작은 배를 타고 일본으로 소위 '튀었'지만 벨테브레는 엄청난 호란에 참전하여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전공을 세워(이른바 이이제이) 박연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아 결혼하여 관직을 얻고 조선최초의 서양 통역관이 되었다.

 

항왜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고, 따라서 그 당시의 조선은 일본인이라고 하여 그들을 받아들여 동일한 조선인으로 생각하는 것이 당연했을 것이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현대의 대한민국은 이런 효과적인 전술을 완전히 잊어버린 것 같다. 아마도 구한시절 고종이 펼친 나름의 이이제이가 제대로 먹히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한다.

 

고종의 이이제이를 생각해본다면, 당시 대한제국이 너무나 취약했기 때문에 사실상 이이제이를 통한 우위가 불가능한 상태여서 실패한 것이 확실하다. 사실상 모든 것이 외세에 달려있던 상황이니 말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어떨까? 그래도 '나름의 혁명'을 통해 어설픈 민주화를 거치고 또 '나름의 경제수준'을 갖춘 국가의 모양새는 갖춘 상태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나름의 모양새는 과거와는 상당히 달라서, 국가의 틀을 갖췄던 조선이 이이제이로서 작은 몸집을 보완하고 적국을 치던 것이 이제는 한쪽에 너무 치우쳐서 한 때 같았던 족속이었던 사람들을 도로 치고 있지 않은가?

 

지금 우리가 할 일은 같은 내부를 치는 것이 아니라, 나보다 더 큰 적을 다른 적으로서 치고, 그 안에서 우위를 점하는 태도임이 분명하다. 우리가 조선의 후손이고 또 이제는 자신만의 나라를 되찾은 사람들이 분명하다면, 그리고 이 좁은 땅에서 더 강해지려면 그 옛날 항왜와 이이제이를 성찰해보는 일이 정말 중요한 최우선의 과제이다.

하는 말 1

하루하루 죽어가는 삶을 산다는 것은

가장 평범한 나날을 보내는 것이고

 

그리하여 나는

가장 평범한, 그런 죽음의 길로 나아가야지

 

나는 죽어서도 걸어갈 것인가 아니면

죽어서 그 자리에 멈출 것인가 잘모르지만

 

아직은 잘 모르지만 일단 지금은

멈추지 말아야지, 내가 만약 지금 이 순간에

이 자리에서 멈춰야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무심하게 내 양쪽 다리를 천천히 움직일 것이다.